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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속과 전통 의례

굿이 금기되던 시대: 전통 의례 탄압과 민속 저항사

by news7809 2025. 6. 27.

굿은 한국 무속 전통 의례의 핵심이지만, 식민지와 군사정권 시대를 거치며 미신으로 탄압받았습니다. 이 글은 굿에 가해진 사회적 금기와 억압의 역사를 되짚고, 무속이 어떻게 저항하며 생존했는지를 분석해 보았으며. 무속 신앙과 굿이 억압 속에서도 어떻게 감정의 언어로 살아남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전통 의례 탄압과 민속 저항사

 

목차

 

억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굿

굿은 한국 무속 전통 의례의 핵심이자,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민중의 감정 해소 체계였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굿이 곧 ‘미신’, ‘비합리’, ‘전근대의 잔재’로 간주하여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유교적 국가 질서 속에서도, 일제강점기의 제국주의 체제하에서도, 군사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 안에서도 굿은 지워지려 했고, 금기시되었으며, 억압받았다. 그럼에도 굿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한 상징성과 감정의 구조로 민중 속에 숨어들었다.

이 글은 굿이 역사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억압당했고, 왜 금기시되었으며, 그 와중에도 어떻게 민중의 언어로 살아남았는지를 다룬다. 굿은 단지 제의가 아니라, 기억의 형식이고 감정의 시스템이며,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조선 후기: 유교 국가의 통제와 민간의 저항

조선은 철저히 유교 중심 사회였다. 제도화된 제사와 예법 외의 모든 의례는 '음란하고 미신적인 것'으로 규정되었고, 특히 굿은 여성 무당이 행하는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의례라는 이유로 더욱 배척당했다. 무당은 관청의 허락 없이 굿을 행할 수 없었으며, 단속과 처벌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굿은 지방 마을, 농촌, 도시 빈민가 등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왜일까? 국가 제례는 죽은 자를 위한 질서였지만, 굿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한 위로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 병든 가족을 둔 어머니, 예기치 못한 사고 앞에 무력해진 사람들에게 굿은 절실했다. 굿은 통제할 수 없는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을 잠시라도 해소하게 해  주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 식민 권력 아래 조직적 말살

일제는 한국의 민속 문화를 ‘미개함’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근대화의 명분으로 이를 탄압했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무속 단속령’을 발표하여 굿과 점술, 부적 등을 불법 행위로 규정했다. 경찰은 굿판을 단속했고, 무당들은 무구를 몰수당했으며, 일부는 ‘풍속 문란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굿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당들은 굿을 ‘치유 기도회’나 ‘조상 해원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진행했고, 일부는 일본식 신사 제례와 혼합된 형식으로 위장하여 생존을 이어갔다. 이것은 무속이 단순한 주술이 아니라, 민중의 정서와 공동체 기억의 형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억눌린 삶, 수탈당한 일상에서 굿은 저항의 상징이자, 자신을 되찾기 위한 감정적 복원 방식이었다.

 

산업화와 새마을운동 시기: ‘미신 타파’의 명분

19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명분으로 무속 문화를 ‘퇴치해야 할 미신’으로 몰아갔다. 정부는 ‘새마을운동’과 ‘생활개선 운동’을 통해 굿을 비과학적, 비문명적 요소로 간주했고, 많은 무당이 불법 신분으로 추락했다.

이 시기 전국에서 수많은 마을굿이 중단되었고, 마을 신당과 산제당은 철거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무당의 거주지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굿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식적으로 금지되자, 사람들은 더욱 비밀스럽게 굿을 진행했다.

무속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지만, 더 강한 형태로 감정의 언어가 되었다. 굿은 다시 '지하 문화'가 되었고, 공동묘지, 산속, 아파트 지하 등에서 행해지며 도시 빈민의 마음을 붙들었다.

 

종교 간 갈등: 기독교의 무속 배척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급격히 확산하였고, 그 영향력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계는 무속과 굿을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배척했다. 많은 교회에서는 무당 개종 간증을 내세우며 무속을 ‘퇴치 대상’으로 여겼고, 굿은 ‘사탄의 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 결과 무속은 공적인 공간에서 더욱 숨게 되었고, 굿은 점차 ‘은밀한 문화’로 전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굿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고, 해석되지 않은 죽음과 질병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굿은 신앙이 아니라 치유였고, 삶의 해석이자 감정의 언어였다.

 

굿은 왜 사라지지 않았는가?

무속은 종교가 아니었다. 굿은 말이 되지 않는 고통에 말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병명 없이 죽은 자, 꿈에 나타나는 조상, 반복되는 불운과 정리되지 않은 죄책감 앞에서 굿은 유일한 해석의 도구였다. 굿은 신에게 기도하는 동시에, 사람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고 회복하기 위한 언어였다.

굿이 사라지지 않은 진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을 다루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억울함, 두려움, 죄책감, 그리고 말하지 못한 상실의 감정은 쉽게 설명되거나 치료되지 않는다. 굿은 그런 감정에 ‘틀’을 부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안전하게 꺼낼 수 있도록 돕는 의례였다. 그래서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과학과 종교가 무속을 외면했어도 사람들은 굿을 찾았다. 삶의 어느 구석에서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한 굿은 필요했고, 그래서 굿은 단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금기 속에 피어난 생존의 문화

굿은 수많은 시대에서 억압받고 탄압되었지만, 단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굿이 단지 신을 부르는 의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굿은 상처를 치유하고, 죽음을 해석하며,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정리하는 인간의 내면 언어였다.

굿은 신앙이라기보다 감정의 구조였고, 존재 해석의 방식이었다. 금지될수록 굿은 더 강해졌고, 통제받을수록 민중의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지금 이 시대에도 굿은 살아 있다. 굿은 여전히 말하지 못한 자의 목소리이고, 감춰진 기억의 무대이며, 무속이라는 전통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언어다.